2024. 7. 13. 23:50ㆍ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록하기/영화
- 잔혹했던 그날의 일기
- 그럼에도 지켜낸 무언가
- 끊어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가
백조 The Swan, 2023
- 개봉 : 2023. 09. 28
- 국가 : 미국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이상 관람가
- 시간 : 17분
- 감독 : 웨스 앤더슨
- 출연 : 루퍼트 프렌드, 에이사 제낭스, 랄프 파인즈
- 채널 : 넷플릭스
- 로튼토마토 : 신선도 94%, 팝콘 75%
- IMDb : 6.7
줄거리
덩치 크고 무지막지한 두 소년이 왜소한 모범생 소년을 잔인하게 괴롭힌다. 로알드 달의 소설을 원작으로 웨스 앤더슨이 선보이는 단편 영화 4편 중 하나.
출처 : 넷플릭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첫 번째로 봤던 <독>보다 소설을 읽어주는 듯한 방식이 더 많이 반영된 영화였다. 처음엔 그저 ’이 작품은 다르게 구성했나 보다’라고 봤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니라는 소년이 생일 선물로 받은 총을 여기저기 쏴대며 영화가 시작된다. 생일 선물로 총을 사주는 클래스는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인지 문학작품 속 이야기인데도 화가 뻗친다. 어니는 친구 레이먼드와 함께 좁은 길을 걸어가며 선물 받은 총으로 눈에 보이는 작은 새들을 모두 쏘아 죽인다. 왜 쓸데없이 총을 잘 쏘는 건지 그것도 화가 난다. 그들은 신나게 새를 쏴 죽이다가 덤불 속 작은 소년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는 피터 왓슨이다.
지금까지 사회자 역할을 하며 상황을 설명해 주던 인물이 작은 사진 하나를 꺼내며 피터 왓슨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피터 왓슨은 똑똑하고 음악을 좋아하며 예의 바른 소년이다. 그들은 피터 왓슨에게 다가가 총을 겨누었다. 피터 왓슨은 이미 몇 년 동안 그들의 괴롭힘을 당해왔다. 도망치거나 도움을 구해봤자 순간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대화로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들의 괴롭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작은 새 대신 작은 피터 왓슨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터 왓슨을 총으로 위협해 손목과 발목을 꽁꽁 묶은 다음 철로 중간에 눕혔다.
바로 이 철로였다.
바로 이 철로에서 27년 전 내가 당한 일이다.
영화의 화자는 성인이 된 피터 왓슨(루퍼트 프렌드)이었다. 성인 피터 왓슨은 철도 가운데 누워 상황을 설명한다. 본인의 움직임, 어니와 레이먼드의 태도, 본인이 한 말과 들은 말, 그리고 본인의 눈에 보였던 많은 것들. 마치 지금 본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처럼 상세하게 설명했다. 피터는 침착하게 본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누워있는 방법, 발의 모습, 머리의 각도 … 똑똑하고 현명한 아이였다. 그리고 기차 소리가 들렸다. 기차가 다가온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차가 들이닥쳤다. 머릿속에서 총이 발사된 듯했고 엄청난 기세와 소리로 몰아치는 바람은 허리케인처럼 콧구멍에서 허파까지 휘저어댔다.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숨 막히는 바람. 괴성을 지르는 식인 괴물이 자신을 산 채로 입에 넣고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 모든 게 끝났다. 기차가 지나간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피터 왓슨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 장면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황을 보여주지만 충분히 그 작은 아이의 두려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본인이 겪었던 상황을 되새긴다고 한다. 피터 왓슨은 평생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시간 이때의 감정과 상황을 되새겼을까. 그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쯤만 해도 충분히 나쁜 놈들이다 싶은데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괴롭힘을 시작했다. 피터 왓슨에게 ‘포로’라고 지칭하며 자리를 옮겼다.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가지고… 그들은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는 백조 한 마리가 둥지 위에 있었다.
'여..여긴 조류 보호구역이야.' 피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어니가 물었다.
피터는 저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백조는 잉글랜드 최고의 보호종 조류야. 둥지에 있을 땐 절대 쏘면 안 돼. 새끼를 품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지 마, 안돼! 제발 그러지 마, 안돼!’
피터 왓슨의 절박한 외침에도 그들은 백조를 향해 총을 쐈고 백조는 죽었다.
이때 성인 피터 왓슨이 화가 난 얼굴과 말투로 화면 전환을 도와주는 스태프에게 말했다.
“열어요.”
그의 이 한마디와 눈빛으로 그날의 분노를 느끼기 충분했다.
5월의 아름다운 아침 햇살가득한 호숫가에 서 있는 피터 왓슨
피 묻은 커다란 날개가 몸 양쪽으로 기괴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피터 왓슨에게 죽은 백조를 가져오라며 협박했다. 처음 피터 왓슨은 그들의 말에 반항했지만, 결국 그들의 폭력에 굴복하여 죽은 백조에게 향했다. 피터 왓슨은 천천히 백조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조심히 안아 올렸다. 죽은 백조 옆 둥지 안엔 작은 새끼 백조 두 마리가 있었다. 어니는 혹시 그곳에 알이 있냐고 물었다. 피터 왓슨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피터 왓슨은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백조의 새끼들을 지켜줬다. 어니는 죽은 백조의 양날개를 칼로 잘랐다. 그리고 거기에 끈을 달아 피터 왓슨의 어깨에 메달았다. 미친 새끼…
어떤 이들은 궁지에 몰려 더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대로 꺾이고 무너져 포기한다.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어째선지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전쟁 중에도 평화로울 때도 눈에 띈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그들은 고통이나 고문에도 목숨이 위험해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어린 피터 왓슨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애쓰는 동안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문득 찾아왔다.
그들의 기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커다란 버드나무 앞으로 향했고 피터 왓슨에게 나무 꼭대기 위로 올라가 날아보라고 말했다. 피터 왓슨은 그 순간 버드나무 위로 올라간다면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해했다.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터 왓슨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만큼 올라갔다. 어니와 레이먼드는 피터가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피터 왓슨에게 가지 끝으로 걸어가 물 위로 날아오르라고 말했다. 날지 않으면 총을 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피터 왓슨은 그대로 서 있었고 어니는 피터 왓슨에게 총을 발사했다. 첫 발은 머리 옆을 스쳤다. 피터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총알을 쐈고, 그 총알은 피터 왓슨의 허벅지에 박혔다.
피터 왓슨은 자신의 집 뒤뜰 잔디밭에 추락했다. 그의 어머니는 쓰러져 있는 외동아들을 보며 울부짖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독>의 경우 배우들 간 어느 정도의 티키타카가 있었다면 <백조>는 이야기의 참조용 정도로만 배우들의 연기가 보여진다. 성인 피터 왓슨의 배경에 대부분 존재한다. 그리고 결정적 장면이나 움직임은 성인 왓슨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말하는 화자였기에 극 안과 밖을 오가며 이야기와 연기를 함께한다.
섬세하다고 느꼈던 것은 피터 왓슨이 괴롭힘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장면에서는 꼭 성인 피터 왓슨이 연기를 한 것이다. 어린 피터 왓슨에게 더 이상의 아픔과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피터 왓슨은 자신이 괴롭힘을 당할 때는 반항하지 않았다. 최대한 대화로 해결해보고 싶었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현명한 친구였다. 그랬던 친구가 가장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백조의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백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처음으로 저항했다. 그 저항으로 백조를 지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백조의 새끼 두 마리는 지켜냈다. 어떤 어른도 지켜주지 못했던, 하물며 자신의 부모조차 자식의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그래서 보호받지 못했던 아이가 작은 백조 두 마리를 지켜낸 장면은 꽤 뭉클하게 다가왔다.
<백조>는 실제로 신문에 실렸던 사건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며 달은 이 이야기를 30년간 ‘아이디어 북’에 간직했다가 1976년 10월에 집필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실화이다. 로알드 달이 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담아두었다가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1976년에 집필했으니 그것보다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한숨이 먼저 나온다. 이런 괴롭힘의 역사는 왜 이렇게나 깊은지, 상황이 나아지고는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아주 아주 멀리서 봤을 때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도, 이런 반복된 슬픔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것이, 약자를 괴롭힌다는 것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되려 부끄럽고 천하디천한 행동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는 시대가 올까?
<독>에 이어 <백조>도 인류애를 한 단계 낮춰주는 영화였다. 짧은 이야기인데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는 감독의 실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뚜벅 추천 지수 : 80%
현실만큼 잔혹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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