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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밝은 밤 / 최은영 / 네번째 지연 이야기

dont-doze-off 2024. 5. 25. 23:03

최은영 작가 <밝은 밤> 표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네 번째. 지연 이야기

 

지연은 이혼 후 내려온 희령에서 할머니를 만나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상처를 치유받고 엄마를 알아간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 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아무리 허접한 남자라도 울타리가 된다는 엄마의 말은 지연과 내 마음을 모두 답답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눈에는 ‘착한 사위’만 눈에 들어왔고, ‘아픈 딸’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혼 후에도 바람을 핀 사위를 걱정했다. 저 부분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읽었다. 도대체 어떤 엄마가 딸에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지연의 엄마는 딸의 이혼 때문에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 지연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그 엄마의 눈에 가장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딸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이런 엄마였기에 난 지연의 할머니가 좋았다. 그리고 지연이 아팠다.

 

 

 

 

- 이번에 명희 언니 만나면서 잡고 싶어졌어.

- 뭘?
- 인생을

 

<밝은 밤> 리뷰를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한 공감을 전했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부터 이 책에 집중했던 것 같다. 종종 마음을 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무언가와 누군가와 아픈 이별을 했을 때 그 슬픔을 주체하기 어려워 이걸 잠시 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견디고 싶지 않은 상황. 그냥 마음 하나 빼버려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싶은 상황. 그런 때가 되면 나쁘고 더러워진 마음이 점점 섞여 그 악취를 다른 장기까지 해를 끼치는 기분이다. 그럴 때 지연의 생각처럼 마음을 빼서 씻어주면 좋겠다.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유지되고 있었던 결혼 생활을 굴려 나가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종종 감정과 바람을 사치품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정도면 괜찮지. 더 바라는 건 욕심이지. 배부른 소리야. 그런데 나는 괜찮지 않았다면. 내가 욕심을 내고 싶다면.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배부르지 않다면. 타인이 내 감정을 보통의 저울로 측정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우린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휩쓸리고 내 스스로의 아픔을 꾹꾹 누르며 살고 있다. 내가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스라이팅에 꼼짝달싹 못하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잘 사는 것이 복수라고, 보란 듯이 잘 살면 된다고 말하는 응원의 목소리가 내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에서 내 등을 후려치는 채찍이 되는 동안에.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글이 있는 페이지를 책에서 가장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지연에게 미안하지만, 좋아한다. 지연의 지금 상황이 저릿저릿하게 느껴졌다. 엄마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지연의 아픔이 마치 꾀병인 취급하며 나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면서 마치 의사라도 것처럼 쉽게 이야기한다. 도대체 누가 본다고 보란 듯이 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떠난 사람은 보겠다고 떠났는데... 누가 본다고 그렇게 몰아세우며 살아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했다. 내 자신 속에 숨겨둔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찾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일이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것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존재를 증명했지만 그게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쉽게 찾은 가면이었을 . 타인이 나에게 그랬듯 나조차도 나에게 가면 하나를 던져주며 "존재를 증명해. 그것만이 답이야"라며 몰아붙였다.

 

 

 

 

저도 사과받지 못했어요.

 

누군가는 <밝은 밤>이 사과받지 못한 자들의 치유 과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사과라는 게 말 하나뿐인데 그 가치와 파급력은 엄청나다. 분명 잘못한 사람이 있고 피해를 본 이가 있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 사과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 싫고 답답하다. 증조부도 길남선도 아버지도 지연의 전 남편도 그 누구도 그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알기나 할까. 증조부의 끝은 비극이었지만, 그 죽음 또한 그가 그의 아내와 딸에게 준 또 하나의 상처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끝까지 그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 애들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지연의 언니는 지연이 다섯 살 때 죽었다. 그 죽음은 지연의 엄마에게 큰 상처였다. 그 죽음으로 인해 할머니와 엄마는 완전히 사이가 벌어졌고, 엄마와 지연 사이에 큰 바위처럼 존재했다. 분명 바위가 있는데 엄마는 그 바위를 모른 척하고 싶어 얇은 천으로 덮어두었다. 지연은 그 바위가 그리웠다. 바위가 그리워 이야기도 하고 싶고, 엄마와 바위를 바라보고도 싶었는데 엄마는 그 바위가 너무 큰 상처라 이야기하고 싶지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책의 끝부분에서 엄마와 지연은 언니가 함께였던 시절의 사진을 정리한다. 상처도 치유도 먼 곳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 상처를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상처를 방치하거나 그냥 덮어두면 안 된다. 상처 입은 마음은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줘야 한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도록 지켜봐 주어야 한다. 지연과 할머니의 대화는 서로의 상처를 따뜻한 물로 씻고 햇볕에 말리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 과정이 끝나 서로의 마음이 상처 없이 좋은 향이 나고 깨끗해졌기를 바란다.

 

 


조모는 뭐든 궁금해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책을 좋아해 어린 시절에는 기갈이 사람처럼 책을 읽었다.

엄마도 이것저것 쓰고 이야기하는 즐기는 사람이었고, 세상이 궁금했다.

 

세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우리가 가진 기질을 끝까지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겪은 우리의 할머니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욕망과 꿈을 버리고 숨기는 것이 어쩔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당당했고, 최선의 선택을 했으며, 자신의 자식들을 끝까지 지켜냈다. 책을 보며 여인들에게 존경을 보내고 싶다.

 

책에는 새비아주머니네 이야기도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번엔 지연의 혈연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지연과 지연의 가족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희자와 할머니의 만남이 궁금하다.

 

 

 

내 역할은 작가의 말을 쓰는 지금 여기까지인 것 같다. 책은 책의 운명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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