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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밝은 밤 / 최은영 / 세번째 엄마 이야기

dont-doze-off 2024. 5. 24. 21:54

최은영 작가 <밝은 밤> 표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세 번째. 엄마 이야기

 

<밝은 밤>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엄마’였다. 증조부보다 길남선보다 지연의 남편보다 ‘엄마’가 나를 가장 아프게 했다. 엄마의 말은 지연과 내 마음을 날카로운 칼로 촘촘하게 상처를 냈다. 지연과 엄마가 대화를 할 때마다 내가 먼저 긴장하며 오늘은 또 어떤 종류의 날 선 말을 딸에게 뿜어낼까 겁이 났다. 엄마의 입과 행동이 나에게는 공포였다.

 

 

 

 

-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아무리 허접한 남자라도 울타리가 된다는 엄마의 말은 지연과 내 마음을 모두 답답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눈에는 ‘착한 사위’만 눈에 들어왔고, ‘아픈 딸’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혼 후에도 바람을 핀 사위를 걱정했다. 저 부분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읽었다. 도대체 어떤 엄마가 딸에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지연의 엄마는 딸의 이혼 때문에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 지연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그 엄마의 눈에 가장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딸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이런 엄마였기에 난 지연의 할머니가 좋았다. 그리고 지연이 아팠다.

 

 

 

 

- 이번에 명희 언니 만나면서 잡고 싶어졌어.

- 뭘?
- 인생을

 

엄마는 결혼 전 회사 동료에게 세상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고, 지연의 말을 빌리자면, 남편에게 착취를 당하며 살았다. 자신의 인생을 고이고이 접어 보이지 않는 서랍 구석 깊숙이 넣고 그렇게 살았다. 그 시절 엄마 때는 그랬거니 하고 싶지 않다. 분명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저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고, 엄마는 순응했다. 엄마는 잘살고 싶었다. 내 잘난 아이가 잘 사는 모습을 보며 본인 인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딸의 속이 어찌 되든 딸의 이혼이 그렇게나 화가 나고 이해되지 않았겠지. 자신이 갑자기 멕시코를 여행하며 잡고 싶은 인생이 있던 것처럼 딸에게도 살아 숨 쉴 수 있는, 행복해야만 하는 딸의 인생이 있다는 걸 왜 인정하지 못했을까. 왜 엄마의 그 이야기가 딸의 온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엄마는 자꾸 지연을 약하고 작게 만들었다.

 

 

 

 

- 너무 쉽게만 가려고 하지마. 세상에 그런 거 없다.

내가 아직 서울에 살 때 엄마가 집에 왔다가 정신과 약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
내게 실망했다고, 힘든 일이 있다고 무턱대고 약을 먹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곧 끊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엄마와 맞서 싸웠다면 엄마는 결국 자신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정신과에 의지 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쉽다는 기준은 뭘까. 딸이 마음이 다쳐 약을 먹는데, 엄마는 쉽게 가려 한다고 딸을 꾸짖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충분히 이렇게 말할 있는 엄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 이겨냈는데 그렇게 나약해?"라며 타인을 탓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이여도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족이고 엄마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지연은 도대체 어디에 기대어 아픔을 나눌 있을까. 지연이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평범한 인생은 어떤 걸까. 나이를 먹을수록 '평범한 가장 좋은 거야'라며 나도 습관적으로 이야기하지만, 평범에는 기준이 없다. <밝은 > 나오는 지연의 가족들은 그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모두들 누군가에게 평가되고, 사회적 평범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다른 삶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도 했고, 스스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백정의 딸. 백정의 손녀. 아버지가 버린 딸. 이혼녀. 꼬리표가 그녀들의 평범한 인생을 방해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평범하고 싶었나 보다. 꼬리표를 자신의 선에서 끊고, 자식만큼은 평범하게 살길 바랐겠지. 하지만 거기에 딸의 행복은 없었다.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피하는 게 너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말이야.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되는 거야. 

 

지연은 사촌 결혼식에 참석하여 말 그대로 엄마 아빠에게 깽판을 친다. 본인의 예의 바르고 착한 딸이 가족 행사에서 어른에게 말대답을 하고 자신들의 체면을 구겼다는 사실에 엄마 아빠는 화가 났을 거다. 참아라.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지연의 엄마는 지연에게 이야기하며 좋은 말로 달래려 하지만, 지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이미 그러한 가르침에 너무 상처받고 곪아온 자신이기에 더 이상 그럴 생각이 없었을 거다. 난 이 결혼식 장면이 가장 아슬아슬했고 묘한 쾌감도 있었다. 지연이 그러했듯 자신의 감정을 터뜨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고, 지연의 따박따박 말대답이 꽤나 즐거웠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이게 꿈이에요. 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나만 없었어도 엄마는 덜 힘들었겠지. 차라리 나를 아버지에게 보내지 그랬어. 그러면 엄마나 나나 한결 수월했을 텐데.

 

책의 뒷부분에 엄마의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엄마는 증조모를 좋아했다. 우습게도 이 집안사람들은 자식의 자식에게 잘해주고, 자식들이 할머니와의 시간을 엄마와의 시간보다 편하게 여기는 것이 대를 이어온 풍습처럼 반복된다. 엄마는 꿈에서 증조모에게 자신이 밉냐며 질문을 한다. 꿈에서 깨어 답을 듣지 못한 엄마는 그 답을 계속 고민한다. 엄마는 할머니의 인생이 자신으로 인해 망가졌다,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말썽 부리지 않고 속 썩이지 않고 일찍 철이 들어 할머니의 곁을 떠난 것일까. 책에서는 그것이 복수로 나왔지만, 난 그것이 엄마만의 할머니를 위한 사랑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극적 화해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사람은 평생을 그래왔듯 남처럼 가끔 지연을 통해 약간의 소식만을 전해 들으며 평생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 손에 전해진 사진 장으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지연의 마음 곳에는 아주 작디작은 불빛 하나가 켜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지연의 엄마는 지나치게 나의 엄마와 닮아 있다. 그래서 엄마가 나올 때마다 나의 엄마와 겹쳐져 글자 글자 읽어 가는 것이 힘들었다. 책을 읽다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나의 남편이 바람을 폈다면 엄마는 나에게 뭐라고 할꺼냐고. 엄마는 그런걸 묻냐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안에 많은 의미가 느껴졌다. 역시 엄마는 지연의 엄마처럼 내게 말할꺼야. 참으라고. 그래서 내가 결혼을 안하는거야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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