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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밝은 밤 / 최은영 / 두번째 할머니 이야기

dont-doze-off 2024. 5. 23. 21:37

최은영 작가 <밝은 밤> 표지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두 번째. 할머니 이야기

 

밝은 밤에서 할머니는 스토리텔러다.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 본인과 본인의 딸 이야기를 손녀인 지연에게 전해준다. 지연에게 할머니는 배려 있고 따뜻하고 손놀림이 빠르지는 않지만 끈기 있는 게이머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할머니는 지연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엄마를 닮은 손녀와 만나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딸이 궁금했을까?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지연이 반가웠을까?

 

 

 

 

대접받을 줄도 알아야지 

 

처음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게 된 지연이 밥상을 차려주는 할머니를 보며 불편해 뭐라도 돕고 싶어 하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 이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난 지연이 그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대접을 받을 줄 안다는 것도 경험인데 지연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건가 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할머니는 지연을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내 손녀.' 처음에 할머니는 왜 지연을 모르는 척했을까 궁금했는데, 명확하지 않지만 지연의 추측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알 수 있었다. 지연은 희령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선글라스를 쓰고 울며 다녔고, 그 모습을 할머니는 보셨겠지. 나의 사랑하는 손녀가 이 시골에 와서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다니는 모습을 본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이러한 모습을 봤기에 지연이 이혼했다는 말에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잘했다고 말해 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손녀에게 '넌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으셨을 것 같다.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우리 대견한 영옥이. 아가 아처럼 울지도 않고, 마음 다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서럽구 외로웠어. 아즈마이가 다 안다. 아즈마이한테는 영옥이가 딸이나 진배없다이. 오늘은 마음껏 울고 훌훌 털어버리라우.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랬던 것처럼 ‘백정의 딸’이라는 낙인이 붙었다.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뚜렷이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그 낙인은 할머니와 함께했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러했듯 자기의 아픔을 부모에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증조모는 할머니의 상처를 알게 되었을 때 대신 싸워주었지만, 증조부는 그저 외면했다. 할머니의 상처를 알고 보살펴준 건 새비 아저씨와 새비 아주머니였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포근함과 따뜻함, 평화로움을 주었다. 할머니는 증조모, 새비 아주머니의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했고, 안전함을 느꼈다. 할머니의 유년 시절의 행복은 새비 아주머니네와 함께했던 그 시절이었다.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책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지연의 할머니는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었다. 따뜻했고, 유쾌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다. 근데 왜 엄마에게는 그리도 나쁜 엄마였을까? 엄마와 할머니는 처음부터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한 아이들이 그러하듯 원래 그런 성격이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근데 나의 착각이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는 실금이 가 있었고, 그 금이 점점 커져 어느 순간 더 이상 메우기 힘들 만큼 사이가 벌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는 성인이 되었을 때 할머니에게 벌을 주듯 할머니와 거리를 두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할머니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는 엄마의 마음이.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멀어진 계기는 나오지만, 그 전에도 엄마는 할머니에게 벌을 주고 싶어 했다. 평범한 삶을 주지 못한 할머니가 미웠던 걸까? 자신이 할머니의 짐처럼 느껴져 괴로웠던 걸까.

 

 

 

 

주인아저씨는 그다음날 할머니가 다니던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살됐다. 인근 주민들은 자신이 사상범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들까지 데리고 운동장에 가야 했다 
….
모두 열 명이 총살되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운동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증조모는 앞만 보면서 걸었다. 감정적인 동요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열두 살 할머니도 알고 있었다. 

그때 죽은 사람이 그 열 명만은 아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첫번째 영옥이도 그때 죽었고, 다시 태어난 영옥이는 그 전의 영옥이와는 다른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증조모, 증조부, 할머니는 죽음으로 서로 헤어질 때까지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따. 그리고 셋 다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부서졌다. 

 

할머니는 열두 살이었다. 전쟁은 죽음만으로 사람을 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지르고 부수었다. 고향을, 가정을, 몸을, 마음을, 보이는 모든 것, 보여지지 않은 모든 것을 부수는 게 전쟁이었다. 전쟁을 겪은 한 가족은 그렇게 다들 씻을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안고 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때의 그 병으로 본인이 형편없는 어른이 되었고, 그것이 엄마한테도 영향을 줬을 거라 이야기한다.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머니네 가족이 대구로 피난을 갔을 때를 좋아한다. 증조부가 없어서 좋았고, 명숙 할머니가 있어서 좋았다. 그 시절 할머니는 사랑을 받았다. 모두 다른 질감의 것이었어도 할머니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 할머니와 명숙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장면을 좋아한다. 그런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아도 결국엔 가장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농도가 짙은 감정으로 오래 남아 있는 사람. 할머니와 명숙 할머니는 그런 사이였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살갑게 서로를 대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 책에서 그려지듯 명숙 할머니의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바늘을 잡고 일을 하는 자신과 세일러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은 희자의 모습을 비교하면 할머니는 마음이 아렸다.

 

할머니와 희자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가족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희자의 변화와 자신의 현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다잡기 어려운 상처였을 것 같다. 할머니는 똑똑했다. 책을 좋아했다. 그냥 할머니는 증조모와 증조부의 자식이었을 뿐이다. 대구에서 희령으로 가게 되었을 때 내가 할머니였다면 희령으로 갔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라면 따라가지 않았겠지만, 내가 할머니였다면 나도 할머니처럼 희령으로 가게 되었을 것 같다. 할머니는 포기가 미덕인, 기대를 가지면 안 되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할머니에게 누군가 욕심부려도 된다고, 여기 있어도 된다고, 넌 똑똑한 아이라고 계속 말해주고 길을 잡아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증조부였다면, 증조모였다면. 할머니에게 희자라는 존재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 이상의 것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 같다. 새비 아저씨, 새비 아주머니의 자식이라는 것 자체에서 오는 부러움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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